회의(懷疑)와 믿음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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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6-01 14:40 조회9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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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매주 한 번씩은 주변의 트래킹 코스를 찾아다니려고 한다.
마타마타(Matamata)쪽의 와이레레(Wairere) 폭포의 전경이 보이는 곳과 더 올라 폭포의 정상을 밟았고, 또 오클랜드 가는 방향으로 와이히(Waihi) 계곡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카랑가하케(Karangahake) 광산의 터널을 지나는 코스 12Km를 걷기도 했다. 그리고 가깝게는 망가누이 산(Mt. Manganui)를 오르는데 산에 오르면 가슴과 눈, 그리고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산을 오르는 동안 산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낮은 곳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던 풍광이 탁 트인 시야 안에 새로운 느낌으로 들어온다.
물론 전에도 항상 같은 바다, 같은 산, 같은 사람, 같은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산허리를 돌아 정상에 오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에 다가온다.
보는 높이가 다르고, 보는 각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신비와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그 신비와 기적을 알아보기 위해서 탐구와 실험으로 접근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데이터의 수치들이 증명하는 것을 세상에 발표하고 사람들은 그 발표된 것을 자신의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내 경험과 내 검증이 아닌데도 말이다. 즉 보편타당한 얘기들에 대해서는 사실과 진리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고 밝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허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인가?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검증되어진 내용들만을 자신들의 이성(理性)으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각종 실험과 연구를 통해 밝혀진 많은 사실들은 밝혀졌으니까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 것이지 과거에는 아무도 몰랐던 일들이고,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인간이 자신에게 현실이 되지 않은 일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존재인 동시에 또한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은 꼭 우주적인 것만은 아니다.
눈을 돌려 주변을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도 그 모든 것에 우주적인 생성과 소멸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과 인체의 신비, 그리고 인생의 신비는 그 누구도 단순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
그동안 쏟아진 많은 말들은 자기가 경험하고 사색하고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말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성경의 기적과 놀라운 얘기들이,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때로 허황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기독교적 진리가 과학적 실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한 데이터로 그 수치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개를 돌린다. 불신한다. 빈정거린다. 당연하다. 기독교적 진리는 과학과 실험으로 담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담을 수 없다고 그 자체를 없다거나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혹시 자기가 예수를 믿어버릴까 봐 겁이 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기독교적 진리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 의심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회의(懷疑)하는 것도 용기이기 때문이다.
참된 회의(懷疑)는 믿음으로 산을 오르게 할 것이다.
마타마타(Matamata)쪽의 와이레레(Wairere) 폭포의 전경이 보이는 곳과 더 올라 폭포의 정상을 밟았고, 또 오클랜드 가는 방향으로 와이히(Waihi) 계곡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카랑가하케(Karangahake) 광산의 터널을 지나는 코스 12Km를 걷기도 했다. 그리고 가깝게는 망가누이 산(Mt. Manganui)를 오르는데 산에 오르면 가슴과 눈, 그리고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산을 오르는 동안 산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낮은 곳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던 풍광이 탁 트인 시야 안에 새로운 느낌으로 들어온다.
물론 전에도 항상 같은 바다, 같은 산, 같은 사람, 같은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산허리를 돌아 정상에 오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에 다가온다.
보는 높이가 다르고, 보는 각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신비와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그 신비와 기적을 알아보기 위해서 탐구와 실험으로 접근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데이터의 수치들이 증명하는 것을 세상에 발표하고 사람들은 그 발표된 것을 자신의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내 경험과 내 검증이 아닌데도 말이다. 즉 보편타당한 얘기들에 대해서는 사실과 진리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고 밝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허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인가?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검증되어진 내용들만을 자신들의 이성(理性)으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각종 실험과 연구를 통해 밝혀진 많은 사실들은 밝혀졌으니까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 것이지 과거에는 아무도 몰랐던 일들이고,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인간이 자신에게 현실이 되지 않은 일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존재인 동시에 또한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은 꼭 우주적인 것만은 아니다.
눈을 돌려 주변을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도 그 모든 것에 우주적인 생성과 소멸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과 인체의 신비, 그리고 인생의 신비는 그 누구도 단순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
그동안 쏟아진 많은 말들은 자기가 경험하고 사색하고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말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성경의 기적과 놀라운 얘기들이,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때로 허황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기독교적 진리가 과학적 실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한 데이터로 그 수치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개를 돌린다. 불신한다. 빈정거린다. 당연하다. 기독교적 진리는 과학과 실험으로 담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담을 수 없다고 그 자체를 없다거나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혹시 자기가 예수를 믿어버릴까 봐 겁이 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기독교적 진리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 의심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회의(懷疑)하는 것도 용기이기 때문이다.
참된 회의(懷疑)는 믿음으로 산을 오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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