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집 (201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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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07-28 16:43 조회8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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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내 마음의 집’이 있다.
그곳은 나만의 휴식과 여유가 있는 쉼터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장소이기에 언제나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를 가장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나만의 절대 공간이기도 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간에 내 마음의 집만큼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안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의 집은 나만의 성역(聖域)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 성역 안에 나 아닌 누군가를 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번 잠금장치를 가동하면 그 누구도 함부로 헤집고 들어오는 것을 용인하지도 않고 또한 아무나 드나들 수 있도록 헤프게 허용하지도 않는 곳이 내 마음의 집이다. 오직 내 마음이 허락한 대상만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품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부터 타우랑가 한인장로교회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의 집을 드나든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다 내 마음에 남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 마음에 내가 남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드나들면서 문턱이 닳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내 마음의 집 문턱이 사람들 발길에 채여 닳게 되면서 마음의 문은 좁아졌고, 집안은 무척 협소해 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언제,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의 집이 이렇게도 상대적인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가 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나 자신에게서 상업화된 도시 인간의 회색빛을 보았다.
만나고 헤어짐이 새털같이 가벼운 세태를 보면 우리들 마음의 집은 지푸라기로 지은 헛간만도 못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상대방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내 마음의 집 한 곁을 내 줄 수 있을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 자리에 찢기고, 패인 자국이 선연한 것을 보면서 과연 내 마음의 집을 꿋꿋이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주님께서 내 마음의 집에 충만히 계실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우리는 ‘내 마음의 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개방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집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를 내 마음에의 집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자기 마음의 집에 담을 때까지 희생과 인내가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알지도 못했고, 받아들일 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우리를 당신 마음의 집에 담으셨다.
그건 수천 년을 이어온 주님의 외로운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의 진실을 알게 되면 그토록 항거하던 자기 마음의 집을 열고 주님께서 앉으실 내 마음의 왕좌를 내드리게 된다.
자아로 충만하고,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적인 자랑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의 집에 주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최고의 축복과 최상의 평안과 위대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곳은 나만의 휴식과 여유가 있는 쉼터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장소이기에 언제나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를 가장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나만의 절대 공간이기도 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간에 내 마음의 집만큼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안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의 집은 나만의 성역(聖域)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 성역 안에 나 아닌 누군가를 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번 잠금장치를 가동하면 그 누구도 함부로 헤집고 들어오는 것을 용인하지도 않고 또한 아무나 드나들 수 있도록 헤프게 허용하지도 않는 곳이 내 마음의 집이다. 오직 내 마음이 허락한 대상만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품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부터 타우랑가 한인장로교회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의 집을 드나든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다 내 마음에 남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 마음에 내가 남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드나들면서 문턱이 닳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내 마음의 집 문턱이 사람들 발길에 채여 닳게 되면서 마음의 문은 좁아졌고, 집안은 무척 협소해 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언제,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의 집이 이렇게도 상대적인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가 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나 자신에게서 상업화된 도시 인간의 회색빛을 보았다.
만나고 헤어짐이 새털같이 가벼운 세태를 보면 우리들 마음의 집은 지푸라기로 지은 헛간만도 못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상대방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내 마음의 집 한 곁을 내 줄 수 있을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 자리에 찢기고, 패인 자국이 선연한 것을 보면서 과연 내 마음의 집을 꿋꿋이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주님께서 내 마음의 집에 충만히 계실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우리는 ‘내 마음의 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개방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집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를 내 마음에의 집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자기 마음의 집에 담을 때까지 희생과 인내가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알지도 못했고, 받아들일 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우리를 당신 마음의 집에 담으셨다.
그건 수천 년을 이어온 주님의 외로운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의 진실을 알게 되면 그토록 항거하던 자기 마음의 집을 열고 주님께서 앉으실 내 마음의 왕좌를 내드리게 된다.
자아로 충만하고,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적인 자랑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의 집에 주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최고의 축복과 최상의 평안과 위대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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