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가치를 발휘하는 것 (201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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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8-12 13:29 조회8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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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하나의 음(音)과 같으며, 숫자(數) 같으며, 하천의 여러 지류와 같다. 각각이던 음과 음이 만나 음악을 이루고, 숫자와 숫자가 만나 산수(算數)를 이루고, 하천의 지류들이 만나 강(江)을 이루고 먼지와 먼지가 만나 태산(泰山)을 이룬다. 그냥 하나의 소리에 불과했던 음이 연주를 위한 곡명과 주제가 정해지면, 교향곡이라는 목적의 일부가 되고 비로소 음악이 된다. 하나의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는 하나이지만 숫자와 숫자를 서로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숫자는 셀 수 없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하나일 때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의미가 약하지만 어떤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열(十)이 모이고, 백(百)이 모이고, 천(千)이 모이고, 만(萬)이 모이면 대하(大河)를 이루고, 태산(泰山)도 옮길 수 있게 된다. 단 하나의 개체, 또는 작은 것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가볍게 여겨질 때 큰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 큰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거늘 크기만을 자랑하면 자기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교만으로 전락하게 된다. 모든 것이 단 하나에서,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데서 시작하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한강은 그 길이가 514km에 이르는 장강(長江)이며, 평균 강폭도 900m에 이르는 매우 큰 강이다. 이처럼 큰 강의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아래에 있는 ‘검룡소’라는 아주 작은 샘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검룡소의 용틀임 폭포에서 시작한 작은 물길은 514km의 긴 여정을 굽이굽이 돌아오는 동안 수많은 하천의 지류들을 만나면서 이룬 큰 강의 틀과 도도한 흐름이 서해안과 만나게 되는 경기도 김포시에서 끝이 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연주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지만 교회의 대의(大義)와는 달리 우리는 ‘복음’이나 ‘거룩’이라는 주제가 어색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단 하나의 음(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는 크고 작은 사람이 없고, 모두 소중하다. 각자가 자기 앞에 놓인 말씀의 악보를 숙지하고, 대음악가(Maestro)이신 예수님의 지휘봉에 순종하여 적절한 때에 정확하게 자기의 음을 낼 때 교회는 연주를 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연주자는 아니다. 그래서 연습이나 실전에서 틀린 소리를 낼 때도 있다. 그러나 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정(修正)이다. 수정은 겸손에서 나온다. 겸손이란 자기 음이 틀렸음을 깨닫고 말씀의 악보로 돌아가 말씀의 악보에 맞추는 것이다. 그 겸손함이 자기 뜻대로 내던 음을 악보에, 그리고 지휘자에게 맞추게 한다.
우리는 작은 음(音)과 같다. 다른 소리도 들어야 하고, 특히 말씀을 숙지하고, 지휘자이신 주님의 지휘봉에 집중하도록 자신을 낮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때 진정한 자기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일 때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의미가 약하지만 어떤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열(十)이 모이고, 백(百)이 모이고, 천(千)이 모이고, 만(萬)이 모이면 대하(大河)를 이루고, 태산(泰山)도 옮길 수 있게 된다. 단 하나의 개체, 또는 작은 것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가볍게 여겨질 때 큰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 큰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거늘 크기만을 자랑하면 자기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교만으로 전락하게 된다. 모든 것이 단 하나에서,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데서 시작하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한강은 그 길이가 514km에 이르는 장강(長江)이며, 평균 강폭도 900m에 이르는 매우 큰 강이다. 이처럼 큰 강의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아래에 있는 ‘검룡소’라는 아주 작은 샘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검룡소의 용틀임 폭포에서 시작한 작은 물길은 514km의 긴 여정을 굽이굽이 돌아오는 동안 수많은 하천의 지류들을 만나면서 이룬 큰 강의 틀과 도도한 흐름이 서해안과 만나게 되는 경기도 김포시에서 끝이 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연주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지만 교회의 대의(大義)와는 달리 우리는 ‘복음’이나 ‘거룩’이라는 주제가 어색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단 하나의 음(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는 크고 작은 사람이 없고, 모두 소중하다. 각자가 자기 앞에 놓인 말씀의 악보를 숙지하고, 대음악가(Maestro)이신 예수님의 지휘봉에 순종하여 적절한 때에 정확하게 자기의 음을 낼 때 교회는 연주를 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연주자는 아니다. 그래서 연습이나 실전에서 틀린 소리를 낼 때도 있다. 그러나 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정(修正)이다. 수정은 겸손에서 나온다. 겸손이란 자기 음이 틀렸음을 깨닫고 말씀의 악보로 돌아가 말씀의 악보에 맞추는 것이다. 그 겸손함이 자기 뜻대로 내던 음을 악보에, 그리고 지휘자에게 맞추게 한다.
우리는 작은 음(音)과 같다. 다른 소리도 들어야 하고, 특히 말씀을 숙지하고, 지휘자이신 주님의 지휘봉에 집중하도록 자신을 낮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때 진정한 자기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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