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릇 - 손해를 수용하는 사람 (20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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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22 17:39 조회1,3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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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container),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用器)를 말한다.
1리터 크기의 그릇에 2리터의 물을 담아낼 수 있을까? 담을 수 없다. 용량 초과로 한계를 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말할 때에도 그릇의 크기를 말하게 되는데 사람의 그릇이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기보다는 그 무엇을 담아낼 수 있는 포용력이다. 그릇이 용량 초과를 감당할 수 없듯이 사람도 자기 한계보다 큰 것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통상 그런 것들은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데 자기 용량을 초과하는 것을 담으려는 할 때 있다. 하나는, 욕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의 틀을 깨서 담으려는 경우이다. 자기의 소중한 마음과 몸, 삶의 영역을 깨뜨려서라도 자기 안에 담으려 한다.
결혼이란 그냥 남녀가 만나 사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기존의 내 틀을 깨고 다른 틀을 내 안에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상시 내 그릇의 사이즈로는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깨져야 하는데 안 깨지려 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이다. 깨져야 큰 사람이다. 기뻐서 깨지는 대표적인 경우는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할 때이다. 그 힘듦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안에 나를 닮은 새 생명을 담고 있다는 기쁨이 배가 부르고, 살이 터지는 깨짐을 감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가 보물이 된다.
사기그릇과 같은 물질은 깨지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지만 사람은 자신의 틀이 깨질 때 깨짐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큰 사람의 관건은 담으려는 마음보다 깨지려는 마음에 있다. 하지만 깨지는 것은 정말 싫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체득한 삶의 경험,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삶의 원리와 라이프스타일, 주관들이 다른 것에 의해 깨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깨지는 때가 있는데 나보다 힘이 강한 자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깨지는 경우와 내 스스로 나를 깨뜨려 담을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경우이다. 빼앗기지 말고 내 주면 큰 그릇이 된다.
생각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잘 생각하면 내 것을 내 주고도 결코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
살면서 많은 경우들을 뒤집어 생각해 보고 입장을 바꿔 서 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지동설을 주창했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발상의 전환이 나를 큰 사람이 되게 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의 색깔이 바뀔 때 사람, 환경, 세상, 하나님, 믿음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관용이란 윗자리에 있을 때 아랫사람을 포용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약자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랫사람이, 힘없이 여겨지는 사람도 관용을 베풀 때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내가 믿는 예수 때문에 자신의 그릇이 깨지는 사람은 큰 그릇이다. 큰 그릇은 손해를 수용하는 사람이다. 큰 그릇의 사람을 만나 내가 큰 그릇이 되기도 하지만 아래에서 섬기는 사람이 큰 그릇이면 그가 섬기는 대상도 큰 그릇이 될 수도 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울타리가 있듯이 생각에도 울타리가 있는데 ‘생각의 울타리’가 커지면 감사와 신뢰의 울타리도 함께 커진다. 큰 사람이 되라.
1리터 크기의 그릇에 2리터의 물을 담아낼 수 있을까? 담을 수 없다. 용량 초과로 한계를 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말할 때에도 그릇의 크기를 말하게 되는데 사람의 그릇이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기보다는 그 무엇을 담아낼 수 있는 포용력이다. 그릇이 용량 초과를 감당할 수 없듯이 사람도 자기 한계보다 큰 것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통상 그런 것들은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데 자기 용량을 초과하는 것을 담으려는 할 때 있다. 하나는, 욕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의 틀을 깨서 담으려는 경우이다. 자기의 소중한 마음과 몸, 삶의 영역을 깨뜨려서라도 자기 안에 담으려 한다.
결혼이란 그냥 남녀가 만나 사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기존의 내 틀을 깨고 다른 틀을 내 안에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상시 내 그릇의 사이즈로는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깨져야 하는데 안 깨지려 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이다. 깨져야 큰 사람이다. 기뻐서 깨지는 대표적인 경우는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할 때이다. 그 힘듦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안에 나를 닮은 새 생명을 담고 있다는 기쁨이 배가 부르고, 살이 터지는 깨짐을 감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가 보물이 된다.
사기그릇과 같은 물질은 깨지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지만 사람은 자신의 틀이 깨질 때 깨짐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큰 사람의 관건은 담으려는 마음보다 깨지려는 마음에 있다. 하지만 깨지는 것은 정말 싫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체득한 삶의 경험,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삶의 원리와 라이프스타일, 주관들이 다른 것에 의해 깨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깨지는 때가 있는데 나보다 힘이 강한 자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깨지는 경우와 내 스스로 나를 깨뜨려 담을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경우이다. 빼앗기지 말고 내 주면 큰 그릇이 된다.
생각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잘 생각하면 내 것을 내 주고도 결코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
살면서 많은 경우들을 뒤집어 생각해 보고 입장을 바꿔 서 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지동설을 주창했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발상의 전환이 나를 큰 사람이 되게 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의 색깔이 바뀔 때 사람, 환경, 세상, 하나님, 믿음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관용이란 윗자리에 있을 때 아랫사람을 포용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약자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랫사람이, 힘없이 여겨지는 사람도 관용을 베풀 때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내가 믿는 예수 때문에 자신의 그릇이 깨지는 사람은 큰 그릇이다. 큰 그릇은 손해를 수용하는 사람이다. 큰 그릇의 사람을 만나 내가 큰 그릇이 되기도 하지만 아래에서 섬기는 사람이 큰 그릇이면 그가 섬기는 대상도 큰 그릇이 될 수도 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울타리가 있듯이 생각에도 울타리가 있는데 ‘생각의 울타리’가 커지면 감사와 신뢰의 울타리도 함께 커진다. 큰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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