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과 오래 묵은 사람 (201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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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12-05 13:54 조회1,2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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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것에 대한 부푼 마음과 설렘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내 경우 어린 시절에 새 옷은 설날과 추석 때나 입을 수 있는 호사였다. 그때 돈 500원, 1,000이면 새 옷, 새 신발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명절을 기대하며 기다렸었던 추억이 있다. 헌 것보다는 새 것에 마음이 끌리고 더 좋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새 것이 좋다. 새 것이 왜 나쁘겠는가. 그러나 새 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트한 뻑뻑함이 부드러워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래 전 양복 CF 광고 문구 중에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방금 사도 1년 된 것 같고, 10년이 지나도 1년 된 것 같은 옷”이라는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던 기억이 있다. 적당한 낡음이란 편안함이다. 새 구두를 사면 발이 꽉 조이고, 뻣뻣해서 발뒤꿈치가 까지기도 한다. 새 것이라 좋긴 해도 내 발에 맞게 길들여지기 전까지는 다소 불편함이 있다.
인생을 살아온 발자국들을 뒤돌아보니 조금씩 길게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지나온 날을 회상해 볼 때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그렇게 전력을 다해 손에 쥐려고 했던 것들, 양보하면 마치 밀리는 것 같고, 이것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철벽같이 우기던 막무가내, 반드시 내 뜻,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던 칼날 같은 조급함에 스스로 불에 달구어진 쇳덩이 같이 타올랐던 일들, 그렇게 나를 다스리지 못했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떠오른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하는 마음에 ‘어리석었다, 쓸데없는 욕심이었다.’는 자책감이 든다.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질없었던 일들이 참 많았지 않는가?
꽉 조이는 것 같았던 신발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에 맞게 부드러워지고 편안하게 길들여지는 것처럼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사고(思考)와 행동에서 조금 더 넓어지고 자신과 상대에게 조금 더 편안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든다. 실제로 그래야 하고 …
설날에 먹는 떡국 한 그릇은 흔히 나이 한 살에 비견하는데 떡국 먹듯이 나이도 먹는다. 그런데 나이도 잘 먹어야 한다. 나이를 잘못 먹으면 그만큼 후회와 찌그러짐이 많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민교회 6년을 섬겨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왔고, 또한 갔다.
알만 하면, 정들만 하면, 그 이름이 기억될 만하면, 때로는 믿음의 작은 틀들이 형성될 만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 새로운 사람들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만남, 인간관계, 믿음의 틀 만들기가 때로는 버겁게 느껴진다. 마치 새 구두의 뻑뻑함과 같은 것이랄까?… 목회가 세일즈라면 새 고객들이 항상 좋지만 영혼과 내면의 개혁을 이끌어내고, 겉이 아닌 속사람의 새로움을 이끌어내야 하는 사명이기에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하지만 새 사람의 뻑뻑함과 시간이 지나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치게 한다. 그래서 새 사람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오래 된 사람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하여는 기대와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목사와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신병훈련소의 빨간 모자를 쓴 강압적인 훈련조교가 아니기에 가슴으로 우는 일이 많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이 늘 고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6년차의 아직 연륜이 짧은 교회이기에 오래 묵어 잘 삭은 된장, 고추장 같은 맛깔스럽고 깊은 맛이 나는 교인들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기도한다.
왔다 가면 마음과 기억에서 지워지는 교회이고 싶지는 않은데 …
물건은 새 것이 좋고 사람은 오래 묵은 옛 사람이 좋다고 했던가! 기도할 뿐이다.
내 경우 어린 시절에 새 옷은 설날과 추석 때나 입을 수 있는 호사였다. 그때 돈 500원, 1,000이면 새 옷, 새 신발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명절을 기대하며 기다렸었던 추억이 있다. 헌 것보다는 새 것에 마음이 끌리고 더 좋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새 것이 좋다. 새 것이 왜 나쁘겠는가. 그러나 새 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트한 뻑뻑함이 부드러워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래 전 양복 CF 광고 문구 중에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방금 사도 1년 된 것 같고, 10년이 지나도 1년 된 것 같은 옷”이라는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던 기억이 있다. 적당한 낡음이란 편안함이다. 새 구두를 사면 발이 꽉 조이고, 뻣뻣해서 발뒤꿈치가 까지기도 한다. 새 것이라 좋긴 해도 내 발에 맞게 길들여지기 전까지는 다소 불편함이 있다.
인생을 살아온 발자국들을 뒤돌아보니 조금씩 길게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지나온 날을 회상해 볼 때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그렇게 전력을 다해 손에 쥐려고 했던 것들, 양보하면 마치 밀리는 것 같고, 이것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철벽같이 우기던 막무가내, 반드시 내 뜻,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던 칼날 같은 조급함에 스스로 불에 달구어진 쇳덩이 같이 타올랐던 일들, 그렇게 나를 다스리지 못했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떠오른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하는 마음에 ‘어리석었다, 쓸데없는 욕심이었다.’는 자책감이 든다.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질없었던 일들이 참 많았지 않는가?
꽉 조이는 것 같았던 신발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에 맞게 부드러워지고 편안하게 길들여지는 것처럼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사고(思考)와 행동에서 조금 더 넓어지고 자신과 상대에게 조금 더 편안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든다. 실제로 그래야 하고 …
설날에 먹는 떡국 한 그릇은 흔히 나이 한 살에 비견하는데 떡국 먹듯이 나이도 먹는다. 그런데 나이도 잘 먹어야 한다. 나이를 잘못 먹으면 그만큼 후회와 찌그러짐이 많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민교회 6년을 섬겨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왔고, 또한 갔다.
알만 하면, 정들만 하면, 그 이름이 기억될 만하면, 때로는 믿음의 작은 틀들이 형성될 만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 새로운 사람들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만남, 인간관계, 믿음의 틀 만들기가 때로는 버겁게 느껴진다. 마치 새 구두의 뻑뻑함과 같은 것이랄까?… 목회가 세일즈라면 새 고객들이 항상 좋지만 영혼과 내면의 개혁을 이끌어내고, 겉이 아닌 속사람의 새로움을 이끌어내야 하는 사명이기에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하지만 새 사람의 뻑뻑함과 시간이 지나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치게 한다. 그래서 새 사람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오래 된 사람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하여는 기대와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목사와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신병훈련소의 빨간 모자를 쓴 강압적인 훈련조교가 아니기에 가슴으로 우는 일이 많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이 늘 고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6년차의 아직 연륜이 짧은 교회이기에 오래 묵어 잘 삭은 된장, 고추장 같은 맛깔스럽고 깊은 맛이 나는 교인들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기도한다.
왔다 가면 마음과 기억에서 지워지는 교회이고 싶지는 않은데 …
물건은 새 것이 좋고 사람은 오래 묵은 옛 사람이 좋다고 했던가!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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