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주어진 틀 안에서 돌아가는 것 같아도 거저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 그 어느 것도 저절로 굴러가는 것은 없다.
한 알의 붉은 대추도 저절로 익고 붉어지는 법은 없다. 한 알의 열매가 맺히고 익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바람과 땡볕이 그 한 알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자기 혼자 모양이 만들어지고, 색깔이 입히고 가지 끝에 소담스럽게 맺히는 것이 아니다. 그 작은 한 알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이 지났으며, 얼마나 많은 밤의 달과 별이 빛을 비추었는지 모른다. 자연은 자연을 먹고, 자연과 상통하며 오늘이 있는 것이다. 사람도 그 자연의 한 축이지 않은가…
열매, 과일 한 알도 역경의 시간을 견디어내면서 맺히고 익어갈진대 사람은 오죽 하겠는가?

인생에 따뜻한 햇볕과 훈훈한 바람, 시원한 바람만 있으면 모든 게 좋은 것 같아도 따사로운 햇볕과 살랑거리는 미풍(美風)만 가지고는 사람이 사람 되지 못한다. 한 알의 열매가 선택할 수 없는 밤의 시간을 맞이했듯이 사람 역시 밤과 같은 어두움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둔 밤, 비바람, 찬 서리를 맞아야 속이 차고 견강(堅剛)해진다. 누구도 자기 인생에 아픔이나 혹독한 시련을 원치 않지만 내실이 남다른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시간이 반드시 있었다.

베트남을 통일한 호치민의 어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절굿공이 아래서 짓이겨지는 쌀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수없이 두들김을 당한 다음에는 목화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이 세상 인간사도 때로는 이와 같아서 역경이 사람을 빛나는 옥으로 바꾸어 놓는다.”

형통할 때보다는 힘들고 어렵다고 여겼던 그 시간들을 통해서 사람이 깊어지고 사람으로서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자신의 지성과 경험으로 이해했던 일들보다 이해할 수 없는 더 많은 일들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자신과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뜨인다. 내가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것인지 허공에 떠서 사는 것인지 자기 정체성과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통해서 내면세계의 질서가 정립된다.
추운 것을 경험해 봐야 따뜻함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처럼 소중한 것들이 내 곁에 없을 때 예전의 사람과 소유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내면의 속이 채워지면서 단지 필요성에 의해서 소유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훈련이 반복되면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