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The Apostle's Creed)
(다함께 읽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 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들어가는 기도
가정을 대표하여 한 사람이 오늘의 예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찬양
(다함께 부릅니다)
184장 (통일 173장) ♬ 불길 같은 주 성령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후렴>
성령이여 임하사 우리 영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2.
주의 제단불 위에 우리 몸과 영혼과
우리 가진 모든 것 지금 바치옵니다
3.
모든 것 다 바치고 비고 빈 내 마음에
성령 충만하도록 주여 채워주소서
4.
구속하신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믿고 간구하오니 지금 내려줍소서
아멘
성경 : 사도행전 7장 55-60절
말씀
‘최초’, ‘처음’ 이런 수식어가 붙는 것은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최초’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주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사도들에 비하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그의 구원관은 확고했으며 지나온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담교진 구속사의 의미를 밝히면서 설교했을 때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여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설교에 마음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찔림은 베드로 때의 설교처럼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고 강퍅한 그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똑같은 햇볕과 비이지만 살아 있는 초목에게는 생명의 근원이 되지만 죽은 초목에게는 더욱더 썩어가게 하는 것처럼 똑같은 말씀이고 설교이지만 듣는 사람의 심령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혼이 살아날 수도 있고 완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은 확고한 믿음 위에 서서 설교했지만 결국 산헤드린 공회의 계획대로 예수님과 같이 신성 모독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을 줄 알면서도 어떤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신념이나 사상, 또는 사랑하는 마음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죽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스데반은 자기의 설교가 온화한 은혜를 끼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담대했던 것은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또는 예수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깨닫게 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며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변론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성령 받으셨습니까? 성령 충만하십니까?
우리 신앙의 모든 생명과 영성이 성령 받음과 성령 충만함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지혜가 충만해지며, 성령이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1. 성령이 충만하여야 복음을 증거합니다(54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과 영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알았으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또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 한 마디를 해도 성령이 충만해야 복음 전파를 위한 입이 떨어집니다.
스데반은 살기등등한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시종일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을 나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증거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충만받기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이 충만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전하는 복음에는 영적인 힘, 즉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성령 충만하여 담대해집시다(58∼59절).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자신의 심령 정곡이 찔림 받았을 때 양심이 괴로워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더욱 완악해지고 더욱 강퍅해져서 자신의 속 깊은 정곡을 찌른 그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오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본능적으로 방어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증거한 복음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사태를 담대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는 결연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고통과 슬픔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내가 원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반드시 되어야 하는데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면초가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질병 앞에서, 돈 앞에서, 죽음 앞에서, 사람 앞에서, 자기 인생 앞에서 스스로 절망하면서 우리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간 두려움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다 버리고 그냥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대로 삶을 끝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하십시오.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이든 환경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이든 그 어떤 것이든 성령 충만하여 넘어서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3. 성령이 충만하면 원수를 용서합니다(60절).
나에게 해를 끼쳤거나 내 마음, 내 감정, 내 자존심, 내 앞길을 망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내가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뭐가 안 됐다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내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라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못하겠는데 남편, 아내, 부모형제, 친구 등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나에 대한 허물을 용서하기도 힘이 듭니다.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고상한 얘기 같지만 우리의 실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내던졌던 저 사람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눅 23:34)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설교를 듣고 마음이 강퍅해진 대적의 돌에 맞아 피를 흘려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원수를 사랑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따라 하는 겁니까? 죽음은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고상한 척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스데반의 이러한 기도는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빼앗고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저들을 향하여 던지는 소리가 저주하고 악을 쓰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성령 충만하여야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성령 충만을 혹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실제로 스데반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원수를 향한 용서의 기도와 그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는 것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원수는 항상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경우가 되었든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내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고 멀리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원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를 품는 기도를 하십시오.
안 된다고만 못한다고만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못 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께서 마음을 주시면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것입니다.
✱ 55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령 충만하면 하늘이 보입니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원수에 대해서 담담해지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못한다고 하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령 충만하여 집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무엇을 하게 하시는지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겨봅시다.
오늘 하루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으로 행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가정을 대표하여 한 사람이 대표로 아래와 같이 기도합니다.)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다함께 읽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배를 마무리합니다.
가정을 대표하여 한명이 마무리 기도를 합니다. 가족끼리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안아줍니다. 서로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도록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