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치러야 할 고통 (201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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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16 17:19 조회7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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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현실로 표현하고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구상의 능력이다. 또한 어떤 한 가지 소재에서 느낀 비상(非常)한 감정에 몰입하여 자기 머릿속에, 또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영감(靈感)의 능력이다. 정신을 몰입하여 돌을 쪼아내는 석공에게 어떤 작업이냐고 묻자 돌 속에 갇힌 천사를 끄집어내는 중이라고 대답한다. 어떻게 천사를 끄집어낼 수 있냐고 재차 묻자 석공은 천사가 아닌 것들만 쪼아내면 된다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육체에 갇혀 있던 나를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하셨지만 살다 보니 옛날에 버렸던 육신의 이물질들이 또 다시 덮이고 덮여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두 번으로 시작된 삐뚤어지고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 내면과 육신과 삶에는 세상의 따개비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쌓이고 쌓여 결국 거룩한 모습을 못 알아보게 만들었다. 때로는 수술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것들을 자르고 쪼아내고 도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자학해서는 안 되지만 육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 영으로 육체를 쳐서 굴복시키지 않으면 육에게 영이 지배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일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의 값을 치러야 한다.
목수가 벽을 두들겨 보면 속이 텅 빈 것과 속이 찬 것을 구별해 낼 수 있듯이 영으로 깨어 있어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진정한 것과 꾸며낸 것은 첫눈에 구별해 낼 수 있다. 진정한 것에는 그 사람의 혼(魂), 즉 넋과 얼이 담겨져 있서 몰입할 때 피를 말리는 고통이 혼의 재료로 이입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진정한 글은 인쇄된 활자가 아니기에 단 한 줄에도 영혼의 피가 묻어 있어서 살아 꿈틀대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석공의 손에 들린 정과 뾰족한 망치 끝의 두들김을 통해 참 모습이 아닌 것들이 쪼아져 나갈 때 그냥 그것이 아니고 작품이 된다.
나에게서 나 아닌 것들을 쪼아내면 나는 ‘나’가 된다.
그런데 심각함은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삶에는 진정성과 영혼이 빠진 채 이렇게 저렇게 꾸며낸 모습들이 마치 참모습인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대세(大勢)를 거스르지 못하는 무력함 속에서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모양은 있는데 생명력이 없다. 고통 없는 탄생은 없다. 재탄생 역시 고통이 없이는 새로워짐이 없다.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심정으로, 돌을 쪼아내는 석공의 마음으로, 내가 치러야 할 두드림과 쪼아냄이 있다면 그것을 오늘 치러야 할 고통으로 알고 오늘 그것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육체에 갇혀 있던 나를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하셨지만 살다 보니 옛날에 버렸던 육신의 이물질들이 또 다시 덮이고 덮여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두 번으로 시작된 삐뚤어지고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 내면과 육신과 삶에는 세상의 따개비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쌓이고 쌓여 결국 거룩한 모습을 못 알아보게 만들었다. 때로는 수술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것들을 자르고 쪼아내고 도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자학해서는 안 되지만 육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 영으로 육체를 쳐서 굴복시키지 않으면 육에게 영이 지배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일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의 값을 치러야 한다.
목수가 벽을 두들겨 보면 속이 텅 빈 것과 속이 찬 것을 구별해 낼 수 있듯이 영으로 깨어 있어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진정한 것과 꾸며낸 것은 첫눈에 구별해 낼 수 있다. 진정한 것에는 그 사람의 혼(魂), 즉 넋과 얼이 담겨져 있서 몰입할 때 피를 말리는 고통이 혼의 재료로 이입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진정한 글은 인쇄된 활자가 아니기에 단 한 줄에도 영혼의 피가 묻어 있어서 살아 꿈틀대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석공의 손에 들린 정과 뾰족한 망치 끝의 두들김을 통해 참 모습이 아닌 것들이 쪼아져 나갈 때 그냥 그것이 아니고 작품이 된다.
나에게서 나 아닌 것들을 쪼아내면 나는 ‘나’가 된다.
그런데 심각함은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삶에는 진정성과 영혼이 빠진 채 이렇게 저렇게 꾸며낸 모습들이 마치 참모습인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대세(大勢)를 거스르지 못하는 무력함 속에서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모양은 있는데 생명력이 없다. 고통 없는 탄생은 없다. 재탄생 역시 고통이 없이는 새로워짐이 없다.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심정으로, 돌을 쪼아내는 석공의 마음으로, 내가 치러야 할 두드림과 쪼아냄이 있다면 그것을 오늘 치러야 할 고통으로 알고 오늘 그것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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